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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ne 27, 2020

결핍된 서로를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부둥켜안고 가는 일 - 한겨레

kokselama.blogspot.com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⑩슬기로운 사랑 생활 2

연애하면서 안 신랑의 우울증
심해지면 눈 감은 사람같이 돼
이성애·동성애, 남녀 성별 떠나
이 관계 괜찮은 걸까 두려웠다

관계 위해 지킬 몇가지 부탁
그렇게 해서까지 그깟 사랑
이어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내게 사랑은 결핍된 서로를
그럼에도 부둥켜안는 일

신랑 박조건형씨의 우울증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웃기는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누워 있는 신랑의 위로 ‘점프’해서 매달리며 장난을 치면, 신랑은 저 마누라가 또 왜 저러나 고통스러운 중에도 고개를 들어 내 장난을 받아준다. 김비 제공
신랑 박조건형씨의 우울증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웃기는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누워 있는 신랑의 위로 ‘점프’해서 매달리며 장난을 치면, 신랑은 저 마누라가 또 왜 저러나 고통스러운 중에도 고개를 들어 내 장난을 받아준다. 김비 제공
11년 동안 내 곁에 함께 있는 나의 신랑은, 안타깝게도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라고 했으니까, 벌써 28년째다. 그는 트라우마가 되었던 특정한 사건과 상황들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그때의 흐릿한 시간이 그의 우울증의 전부라고 믿지는 않는다. 우울이든 불안이든 어떤 선을 넘어버린 감정은, 너무 많은 것에서 자양분을 얻고 너무 복잡하게 뻗어나간다. 어서 빨리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또 다른 불안이 되고, 왜 다시 또 재발하고 말았는가 자책하면서 우울은 깊어만 간다. _________
상태가 괜찮을 때만 곁에 있는 사람 같아
신랑의 우울증을 처음 목격한 것은 연애 초기 데이트 중이었다.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하고 잘 따라주었는데, 물건을 사느라 매장을 돌아다니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눈빛도 이상하고 고개도 못 든 채 안절부절못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우울증이 있다고 털어놓았는데, 무지했던 나는 ‘밝은 생각’ 어쩌고 ‘긍정적인 태도’ 어쩌고 해맑게 웃어주고는 그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우울증이 있는 것 아니냐고, 당사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말을 생각 없이 내뱉고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며 장거리 연애를 할 때에는 2주에 한번만 보면 되니 상관없었는데, 내가 거주지를 양산으로 옮기면서 문제는 단박에 도드라졌다. 신랑은 자신의 우울증이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나에게 들킬까 전전긍긍이었고, 좀 더 긴 시간 곁에서 그를 지켜보니 하루하루 이어가는 그의 안간힘이 보였다. 나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는 생산직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직장을 다니는 일도 어떻게든 스스로를 억지로 일으키려는 안간힘이었고, 또 나와 연애를 시작하며 우리의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상태가 괜찮을 때에는 그렇게 배려심 많고 다정한 사람이 또 없었는데, 우울증이 심해질 때면 눈을 질끈 감고 사는 사람 같았다. 곁에 누가 있는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심지어 매일 가던 길인데도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되돌아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우울증은 단순히 마음가짐을 고쳐먹는 일이나 지나가는 감기 따위였는지 모르지만, 신랑에게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가두어버린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았다. 이성애 동성애를 떠나, 남자 여자 성별을 떠나, 이 관계를 이어가도 괜찮은 걸까, 솔직히 너무도 두려웠다. 아니, 그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겠다고 결심하고서 돌아섰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시간 여행을 떠났다가 짧은 시간만 곁에 나타나는 소설 속 어느 연인처럼, 그는 상태가 괜찮을 때에만 곁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곁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서 그의 안간힘을 지켜봐야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어서 빨리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서 빨리 내 앞에 나타나기를, 그렇게 다정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어서 빨리 내 앞에 나타나기를.
<잃어버린 시절>. 김비, 디지털화
<잃어버린 시절>. 김비, 디지털화
그 사람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는 마음이 날마다 부딪쳤다. 기다림은 몇 주가 아니라 몇 달씩 이어지기도 했고,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삶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가난이든 정체성이든, 이 사회의 폭력이든 편견이든, 궁지에 몰릴 때마다 그랬다. 삶이 나를 벼랑 끝으로 떠밀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 손아귀에 지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지켜야 할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일. 나는 신랑에게 우리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그 나머지는 결코 문제 삼거나 화내지 않을 테니,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것만은 반드시 지켜달라고 했다. 제일 먼저,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는 일, 밤에는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일. 삼시 세끼 밥을 챙겨 먹는 일, 끼니를 준비한 사람에 대한 예의이니 설거지 정도는 하고,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 힘들더라도 몸을 일으켜 주는 일. 그 이외에 다른 것은, 결코 요구하지도 투정 부리지도 않겠다고 나는 신랑과 약속했고, 그도 알겠다고 했다. 물론 그 모든 약속은 둘 사이의 관계를 위한 것일 뿐,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또 남아 있었다. 신랑이 스스로의 우울을 감당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우울과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루 종일 웅크리고 누워 있는 그를 지켜보는 일,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으려는 그를 마주하는 일, 말 없는 그의 앞에서 혼잣말을 이어가는 일, 닫힌 그의 방문을 보는 일, 몇 주고 몇 달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는 일. 그렇게 해서까지 그깟 사랑을 이어가고 싶은 거냐고,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래서 사랑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날 때부터 온전해, 칭송받고 축하받고,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서로이기 때문에 완벽한 사랑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사랑은 결핍된 서로를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부둥켜안고 함께 가는 일이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우울의 여행을 떠나고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반복되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곁을 지키고 있는 서로를 확인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나는 사랑하고 있구나 알게 된다. 판타지로 포장된 얄팍한 욕망이나 목적을 벗어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음을. _________
알고보니 나 자신을 위한 것들
그렇게 여러 해 신랑과 같이 버텨내는 삶을 살다 보니, 웃기는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개그우먼처럼 온 아파트를 과장된 몸짓으로 뛰어다니거나 뜬금없는 춤을 추기도 하고,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킬킬대기도 한다. 웅크리고 누워 있는 신랑의 위로 ‘점프’해서 매달리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신랑도 저 마누라가 또 왜 저러나 고통스러운 중에도 고개를 들어 내 장난을 받아준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신랑의 우울을 걷어내보려는 노력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나 역시 궁지에 몰리고 또 다른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었기에. 여전히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편견에 갇힌 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갇힌 것이 나라고 고백했지만, 요즈음 나는 지금 우리 사는 사회 역시 사랑 잃은 감옥에 갇힌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제대로 된 성애적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적 사랑조차도 말이다. 어찌해도 나에게는 후세가 없겠지만, 사랑이 단순히 핏줄로 이어진 것이라면 이 사회가 신봉하는 그 사랑을 나는 물려줄 방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든 편견이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마땅한 다음 세대에게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이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이 있든 없든 고독해지고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더라도,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 믿게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알맹이 없이 화려하기만 한 전시품 같은 사랑 말고, 진짜 사랑을 먹고 사는 미래가 오기를.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랑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 역시 당신처럼 사랑 가득한 인간 세상이 참으로 그립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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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7, 2020 at 06:1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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