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⑩슬기로운 사랑 생활 2
⑩슬기로운 사랑 생활 2
연애하면서 안 신랑의 우울증
심해지면 눈 감은 사람같이 돼
이성애·동성애, 남녀 성별 떠나
이 관계 괜찮은 걸까 두려웠다
관계 위해 지킬 몇가지 부탁
그렇게 해서까지 그깟 사랑
이어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내게 사랑은 결핍된 서로를
그럼에도 부둥켜안는 일
신랑 박조건형씨의 우울증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웃기는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누워 있는 신랑의 위로 ‘점프’해서 매달리며 장난을 치면, 신랑은 저 마누라가 또 왜 저러나 고통스러운 중에도 고개를 들어 내 장난을 받아준다. 김비 제공
상태가 괜찮을 때만 곁에 있는 사람 같아 신랑의 우울증을 처음 목격한 것은 연애 초기 데이트 중이었다.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하고 잘 따라주었는데, 물건을 사느라 매장을 돌아다니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눈빛도 이상하고 고개도 못 든 채 안절부절못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우울증이 있다고 털어놓았는데, 무지했던 나는 ‘밝은 생각’ 어쩌고 ‘긍정적인 태도’ 어쩌고 해맑게 웃어주고는 그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우울증이 있는 것 아니냐고, 당사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말을 생각 없이 내뱉고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며 장거리 연애를 할 때에는 2주에 한번만 보면 되니 상관없었는데, 내가 거주지를 양산으로 옮기면서 문제는 단박에 도드라졌다. 신랑은 자신의 우울증이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나에게 들킬까 전전긍긍이었고, 좀 더 긴 시간 곁에서 그를 지켜보니 하루하루 이어가는 그의 안간힘이 보였다. 나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는 생산직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직장을 다니는 일도 어떻게든 스스로를 억지로 일으키려는 안간힘이었고, 또 나와 연애를 시작하며 우리의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상태가 괜찮을 때에는 그렇게 배려심 많고 다정한 사람이 또 없었는데, 우울증이 심해질 때면 눈을 질끈 감고 사는 사람 같았다. 곁에 누가 있는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심지어 매일 가던 길인데도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되돌아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우울증은 단순히 마음가짐을 고쳐먹는 일이나 지나가는 감기 따위였는지 모르지만, 신랑에게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가두어버린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았다. 이성애 동성애를 떠나, 남자 여자 성별을 떠나, 이 관계를 이어가도 괜찮은 걸까, 솔직히 너무도 두려웠다. 아니, 그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겠다고 결심하고서 돌아섰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시간 여행을 떠났다가 짧은 시간만 곁에 나타나는 소설 속 어느 연인처럼, 그는 상태가 괜찮을 때에만 곁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곁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서 그의 안간힘을 지켜봐야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어서 빨리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서 빨리 내 앞에 나타나기를, 그렇게 다정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어서 빨리 내 앞에 나타나기를.
<잃어버린 시절>. 김비, 디지털화
알고보니 나 자신을 위한 것들 그렇게 여러 해 신랑과 같이 버텨내는 삶을 살다 보니, 웃기는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개그우먼처럼 온 아파트를 과장된 몸짓으로 뛰어다니거나 뜬금없는 춤을 추기도 하고,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킬킬대기도 한다. 웅크리고 누워 있는 신랑의 위로 ‘점프’해서 매달리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신랑도 저 마누라가 또 왜 저러나 고통스러운 중에도 고개를 들어 내 장난을 받아준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신랑의 우울을 걷어내보려는 노력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나 역시 궁지에 몰리고 또 다른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었기에. 여전히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편견에 갇힌 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갇힌 것이 나라고 고백했지만, 요즈음 나는 지금 우리 사는 사회 역시 사랑 잃은 감옥에 갇힌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제대로 된 성애적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적 사랑조차도 말이다. 어찌해도 나에게는 후세가 없겠지만, 사랑이 단순히 핏줄로 이어진 것이라면 이 사회가 신봉하는 그 사랑을 나는 물려줄 방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든 편견이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마땅한 다음 세대에게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이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이 있든 없든 고독해지고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더라도,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 믿게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알맹이 없이 화려하기만 한 전시품 같은 사랑 말고, 진짜 사랑을 먹고 사는 미래가 오기를.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랑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 역시 당신처럼 사랑 가득한 인간 세상이 참으로 그립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June 27, 2020 at 06:1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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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서로를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부둥켜안고 가는 일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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